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 (브뤼노 몽생종, 정원, 2005)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Sviatoslav Richter, 1915-1997)
독일 출신의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1915년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에 하나이며 그 어떤 기준을 통해서도 리히테르를 넘어서는 피아니스트는 꼽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그의 삶에 관해서는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음악 이외의 것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으나 영화감독인 브뤼노 몽생종의 헌신적인 설득과 끊임없는 방문, 기록을 통해서 한 권의 책과 다큐멘터리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책은 편저자의 서문과 1부 '리흐테르 자신이 말하는 리흐테르', 2부 '수첩, 음악에 관하여'로 이루어졌다. 서문에서는 브뤼노 몽생종이 글렌 굴드와의 영화 편집을 마친 후부터 그의 권유로 리히테르를 만나 이야기를 하고 다큐멘터리 촬영을 진행하는 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과정에서 리히테르와 나눈 이야기를 모아서 리히테르의1인칭 시점으로 다시 회고담을 쓴 게 2부의 내용이다. 브뤼노 몽생종이 사전에 모은 이야기를 통해 다시 풀어쓰게 된 것은 그와의 다큐멘터리 촬영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뒤에 러시아로 떠난 리히테르가 1997년 8월 1일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이 러시아를 침공해 스탈린그라드에 폭탄을 퍼붓던 전란의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주변의 환경과 상관없이 피아노만을 연주했다. 음악의 지휘조차 권력과 분석을 필요로 한다며 지휘를 싫어했던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필수 이수 과목인 정치학을 거부해 두 번의 퇴학 조치를 당했고 스탈린의 장례식 연주에서도 덜컹거리는 피아노를 진정시키기 위한 노력 외에는 관심을 둔 것이 없었다. 러시아 음악 콩쿠르 역시 상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참가를 거부했지만 주변의 끊임 없는 설득이 그를 참가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정치적인 악조건 속에서도 러시아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1위를 하게 된다 (당시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심사위원단이 독일 출신의 리히테르를 1위로 선정하는 건 목숨을 내놓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전란 속에 음악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동료의 근거 없는 밀고로 공산당원들에게 처형을 당하고 그의 친구들 역시 비밀경찰이 들이닥치는 날이면 남녀 불문하고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있었다. 전쟁 속에서 한 예술가의 삶이란 게 얼마나 무기력하고 불안한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그는 폭격당한 도시의 고요함을 느끼며 연주를 하기 위해 어디든 떠났고 반은 독일임의 신분에도 전황과 상관없이 여행을 계속했다. 그의 자화상은 사회와 개인을 분리한 채 그려지고 있었다. 그는 의미 없다고 생각한 모든 것에서 무관심했고 구소련의 체제조차도 그를 속박할 수 없었다. 그가 평생을 마주했던 건 악보와 피아노뿐이다. 그는 명성을 위해 번잡한 곳으로 연주하기 위해 떠난 적이 없다. 피아노가 있는 곳이면 러시아의 시골 마을이나 작은 학교처럼 어디든 가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글렌 굴드는 피아니스트를 악마적인 기교파의 리스트 타입과 리히테르 타입의 두 분류로 구분했다. 이는 피아니스트를 외형적인 테크닉의 기교파와 내형적인 사유파로 분류하는 방식이다. 글렌 굴드는 그렇게 리히테르는 음악의 본질을 꿰뚫는 진정한 음악가 타입의 전형이라며 극찬을 했지만 리히테르는 아이러니하게도 평단에서 현대의 리스트라는 찬사를 받으며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집중력과 설득력을 보여주는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리히테르가 말하는 동시대의 음악가들에 대한 얘기도 흥미롭다. 천재적인 재능에도 병적인 시샘으로 파괴 돼가는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나 현대 클래식의 거장들. 그들의 다양한 재능을 서술하는 부분은 우리 주변의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2부의 내용인 '수첩, 음악에 관하여'에서는 그가 경험한 공연과 연주를 통해 느끼고 생각한 점들이 기록됐다. 책의 저자는 현재 활동 중인 음악가들의 일부 평에 대해서 독설적이거나 그의 활동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만한 부분들은 제외했다고 한다. 국내 번역판에서는 지휘자 정명훈에 관한 기록이 추가로 해석됐다.

리히테르 청력이 계속해서 약해지던 1995년 80세가 되어 귀가 들리지 않아 연주할 수 없게 됐을 때 공식적으로 은퇴했고 러시아로 돌아간 1997년 8월 1일 82세의 나이로 모스크바에의 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책은 영화감독인 브뤼노 몽생종의 리히테르에 대한 헌신적인 노력이 아니었다면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시간 순서에 관계없이 나열되는 모든 기록을 모으기 시작했고 무관심으로 일관해오던 그의 마음을 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그는 1000여 건 이상의 자료를 기록하는 데 성공하지만 기록 외로 몽생종의 리히테르에 대한 깊은 관심과 작가로서의 고투가 없었다면 우리는 회고담을 통해 이렇게 오롯이 거장의 자화상을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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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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