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준비로 너무 바빠서 비행기에서 여행계획 짤 지도 모른다고 농담처럼 말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한 도시에 도착하면 그날 가이드북을 보면서 발 닿는 곳을 찍고, 무작정 걸어다니다가 길을 잃으면 택시를 타고, 맛있는 식당이 보이면 바로 식사를 했다. 8년 전 일본여행을 할 때도 이런 식으로 다녀서 후회했던 적이 있는데, 이탈리아는 달랐다. 세 도시는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어도 그저 아름다웠고, 다녀와서도 계속 기억에 남는 곳이었다. 행선지가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라는 이야기를 들은 매형이 적극 추천해 주었지만 생각조차 하지 못 하고 있었다가 결혼한 지 한 달이 되는 이제서야 세 권을 다 읽었다.
 
 이야기는 베네치아 귀족 태생의 주인공이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순으로 옮겨가며 진행된다. 소설이기 때문에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이지만, 생생한 배경묘사와 역사서를 보는 듯한 문체에는 16세기 당시의 세 도시를 그대로 보여주려는 저자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난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을 때에는 마치 베네치아의 골목을 다시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역사서를 집필해 온 저자의 이력 때문에 생겼던 이야기가 밋밋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첫 권을 읽고 나서 바로 불식되었다. 원제가 '산 마르코 살인사건', '메디치 가 살인사건', '바티칸 살인사건'으로, 역자 소개를 보면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고 하지만 역시 사건보다는 묘사가 중심이다. 읽는 내내 궁금증을 갖고 있다가 탁월한 배경묘사에 빠져 무엇이 궁금했는지도 잊어버린 순간, 진실이 밝혀지는 식이랄까.

 주홍빛 베네치아를 다 읽은 직후에는 조금 당황스러운 면도 있었다. 내용의 반 정도가 투르크 왕국이 지배한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이야기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빛 피렌체를 읽으면서 그 당혹감은 조금씩 사라지고, 황금빛 로마까지 읽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각 권의 물리적 배경은 다르지만 어느 편을 읽든 세 도시의 이야기를 함께 한다. 세 도시를 나누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 로마에 베네치아 광장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이런 방식으로만 설명이 가능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우리의 신혼여행 코스 역시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순이었다. 여행의 기억을 간직한 채로 책을 읽은 덕분에, 아무런 색안경도 끼지 않고 본 현재의 세 도시 위에 저자가 그린 16세기의 세 도시가 되살아나는 최고의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여행하면서 보았던 예쁘고 멋지고 웅장했던 건축물들은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많은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었고, 세 도시에서 벌어지는 가공의 주인공과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는 16세기 당시의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그 자체를 내 눈앞에 보여주었다.

 부제로 붙인 것과는 달리, 혹시 이탈리아를 처음 갈 예정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절대 읽지 않기를 권한다.책을 먼저 읽고 갔다면 저자가 생생하게 그린 세 도시와 그 위에 펼쳐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 때문에 당신의 머릿속에는 16세기의 이탈리아가 먼저 그려져 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보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겠지만 기대했던 모습보다는 아무래도 좀 다른 모습일 것이다. 현재에도 이 정도로 남아있는 데에 놀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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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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