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제게 일본소설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을 좀더 굳혀준(?) 책입니다.

어디선가 이 책의 광고 카피로, '지브리 풍의 판타지 소설'이라고 하는 걸 보았습니다.
저도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꽤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같은 지브리라고 해도 여러가지가 있잖아요. 저는 <천공의 성 라퓨타>나 <마녀의 택급편>, <붉은 돼지> 등을 굉장히 감동적으로 보았는데 그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고 뭔가 형용할 수 없는 허무함을 느꼈었어요.

물론 당시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즐겁게 보신 분도 많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아름다운 비주얼로 가득 차있지만, 밑도 끝도 없이 허망할 뿐인 줄거리의 애니'라고 느꼈습니다. 라퓨타, 마녀의 택급편, 붉은 돼지에서의 뚜렷한 기승전결, 꿈과 사랑과 용기, 우정,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플롯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근래 일본 소설이나 노래 가사, 애니메이션을 보면 왠지 '전하고 싶은 단 하나의 이미지'에 작품의 모든 것을 걸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가사를 읽어보면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고 단지 달콤하고 미묘한 감각의 단어들을 교묘하게 배치해서 그 조합에서 무언가를 느껴보라는 속셈인가 싶을 때가 있고, 소설을 보아도 희한한 느낌의 소재들을 오묘하게도 뒤섞어놓았네 그런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대체 뭐니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만약 이런 시도가 잘 먹힌다면, 마치 보는 사람, 듣는 사람의 마음 속에 직접 그림을 그려주는 듯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걸 읽거나 보고있자면 그저 추상화를 감상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저는 추상화를 전혀 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정도의 난감함)

이 책도 작가가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괴상한 소재들을 여기저기서 끌어모아 한데 뒤섞고 버무려서 줄거리를 풀어나갑니다. 술을 함께 마시던 총각이 느닷없이 텐구(天狗: 붉은 얼굴에 코가 길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요괴)였다고 하질 않나, 지붕에 대나무 숲과 연못이 있는 삼층 버스를 타고 다니는 고리대금업자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여주인공과 밤새 술 배틀을 벌이고 있고, 대학 축제에서는 축지법을 쓰는 고타츠(전열기와 이불이 달린 일본 탁자)가 캠퍼스를 휘젓고 다니고 있고요...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정말 기상천외하군요. 문제는 이것들이 어째서 여기 등장해야하는지, 무슨 내력이 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등장인물 중 누구도 이런 것에 놀라지 않습니다.
기묘한 소재들이 이루어내는 하모니로써 신기하고도 즐거운 분위기를 추구한 걸까요. 저로선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이 소설은 이런 기묘한 소재들을 쏟아내는 것에만 치우치지 않고 소설의 기본적인 요소들과도 균형을 잡고 있다는 점이 -저로서는- 다행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순진하지만 당찬 여주인공은 그 나름의 귀여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캐릭터이고, 그녀를 사모하며 끝없이 주변을 맴돌며 여러가지 모험(사실은 고통)을 겪게 되는 남자 주인공도 재미있는(사실은 불쌍한) 캐릭터입니다. 절정에선 적절히 고조된 분위기에, 이야기의 대단원도 지금까지 따라와준 독자를 배신하지 않는 훈훈한 결말이라서 전체적으로는 괜찮았다는 느낌이네요.

그밖에 이 소설의 괜찮은 점을 꼽자면 신선하고 재미있는 표현을 들 수 있습니다. 의태어나 비유가 독창적이다못해 무려 귀엽다고까지 느껴질 때가 있는데, 작가도 대단하지만 역자 역시 적당한 단어를 찾기 위해 상당한 정성을 쏟은 모양입니다.

꽤나 비판적으로 시작한 것을 수습하려다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서 민망스럽군요. 제 개인적인 취향에서 좀 벗어났을 뿐이지, 만약 평소에 일본 소설을 즐겁게 읽어오신 분이라면 이것 역시 꽤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겠구나 싶습니다.
리뷰를 쓰면서 보니 매사에 지나치게 심각해지는 저의 성격 탓에 이런 밝고 유쾌한 소설을 즐기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살짝 고민되기도 하네요.

ps. 이 책은 커버가 정말 예쁩니다. 
ps2. 지브리 팬들과 일본 소설 매니아들로부터 어택이 두려워 발행하지 않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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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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